북한 군인 탈북 사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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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건순 중위 귀순

 

 

6.25 전쟁 발발 직전이었던 1950년 4월 북한군 공격기 조종사였던 이건순 중위가 IL-10 공격기를 타고 귀순한 사건. 북한군 조종사로 임관했지만 당시 가족들이 이미 다 남한에 있었고 본인도 오려고 했지만 갈 수가 없어서 기회를 엿보다가 함경남도 연포 비행장에서 이륙한 날 노빠꾸로 남한을 향해 날아가버리심. 이후 대한민국 공군에 특별 임관하셔서 1974년 대령으로 예편하심.

 

2. 노금석 상위 귀순

 

6.25 전쟁이 휴전협상을 마친지 3개월도 안 된 1953년 9월 21일 북한군 전투조종사였던 노금석 상위(중위와 대위 사이 북한군 계급)가 자신의 MiG-15 전투기(2057번 기체)를 타고 김포비행장으로 귀순한 사건. 1마일(1.6km)을 6초 만에 주파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남하했는데 당시 관제체계가 신속하지 못했고 휴전선에서 김포까지 거리가 워낙 가까워서인지 휴전선 통과 후 4분 만에 김포비행장에 착륙할 때까지 그 어떤 방해도 안 받음. 노금석 상위는 이 계기로 당시 돈으로 10만 달러의 포상금을 받고 귀순용사 칭호를 받고서 미국으로 건너가 항공기술자로 일하시게 됨 

 그리고 이 분이 타고온 MiG-15는 당대 소련 최신예 주력 전투기였기 때문에 적의 공짜 최신 전투기가 생겨 신난 미군은 바로 다음 날 오키나와로 들고 가서 분해도 하고 조립도 하고 비행도 하고 여러 시험을 거치고 미군의 테스트용 항공기로 재산까지 등록하고 도색도 바꿔버림. 노금석 상위가 받은 10만 달러도 사실 적 정보와 물증을 제공한데 대한 사례금에 가까움.

 

3. 이운용 상위, 이인선 소위 귀순

 

1955년 6월 21일 연락기인 야크-18기(15번기)의 조종사였던 이운용 상위가 귀순하려했던 사건. 이게 무슨 말이냐면 이 날 해주 앞바다에 초도라는 섬까지 연락 임무를 받고 황해 상공에서 갑자기 비행기를 남으로 돌렸는데 이 비행기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항법사였던 이인선 소위도 같이 타고 있었음. 이인선 소위는 당연히 이운용 상위가 탈북하려고 했던걸 모르고 있었으나 이운용 상위가 몇 분동 안 설득하자 감격의 악수를 나누고 선임 따라 강남으로 탈북. (사실 강남은 못 가고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함)

 

 

4. 정낙현씨 귀순

 

1960년 8월 13일 정낙현 씨가 위에 노금석 상위가 몰고 온 것과 같은 MiG-15 전투기(241번 기)를 타고 동해안 대포리 비행장으로 귀순한 사건. 정낙현 씨라고 표시한 이름은 이분은 정식 조종사가 아니라 북한 공군 조종학교 학생이었기 때문임. 참고로 이분 탈북에 성공한 계기가 졸라 웃긴데 착륙 훈련 도중 랜딩기어(바퀴)가 고장 났다고 관제탑에 뻥치고 착륙은 안 하고 갑자기 비행기를 남으로 돌려서 16분 만에 탈북하심. 물론 추격기들이 붙긴 했지만 무사히 넘어옴. 이후 기자회견에서 북한은 지금 전쟁준비에만 미쳤고 조종사들은 연애할 자유조차 없다고 디스 하시기도 함. 이후 대한민국 공군 중위로 특별 임관해서 대령까지 달고 예편하심.

 

 

 

5. 박순국 소좌 귀순...? 

 

 

1970년 12월 3일 박순국 소좌(소령)가 자신의 MiG-15 전투기(239번기)를 몰고 강원도 고성군 거진 해안 모래사장에 불시착해 "얼떨결"에 귀순한 사건. 이게 무슨 말이냐면 원래 박순국 소좌는 귀순하려는 맘이 1도 없었는데 비행하다가 방향 판단을 상실해서 뜬금없이 포항까지 날아오심. 이걸 깨닫고 다시 기수를 북으로 돌려서 북한 땅의 해수욕장인 줄 알고 불시착했는데 알고 보니 거기는 고성에 있는 거진 해수욕장... 이 사건은 북한 전투기 귀순 사건이라는 대사건임에도 많이 알려져 있지가 않은데 그 이유는 앞에 말했듯이 본인이 처음부터 귀순할 마음이 1도 없었고, 적 전투기가 포항까지 날아왔는데 공군에선 적이 온 줄도 몰라서 경계에 실패했기 때문. 어쨌든 처음에는 북으로 송환해달라고 했지만 북한의 실정을 알게 된 후에 마음을 바꾸고 한국 공군에 특별 임관해서 중령까지 다셨으나 1976년 암으로 사망하셨음.(대령으로 추서)

 

 

 

6. 이웅평 상위 귀순 

 

 

귀순계의 레전드 사건. 반공교육과 의식이 하늘을 뚫어버리던 1983년 2월 25일 이웅평 상위가 자신의 MiG-19기(207번기)를 몰고 평안남도 개천 비행장에서 수원비행장으로 귀순하심. 이 사건이 레전드인 이유는 일단 시대가 시대라서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여의도에서 "환영행사"로 시민 130만 명이 옴ㄷㄷ) 귀순의 계기도 우리의 체제가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고 계속 MiG-15 같은 단물 빠진 거만 넘어오다가 드디어 최신 기종인 MiG-19가 처음으로 넘어왔기 때문임.

 

 

 

귀순 계기도 어찌보면 굉장히 단순했는데 본인의 장교 별장이 있는 원산 앞바다 해변길을 걷다가 뭔갈 주으셨는데 그게 삼양라면 봉지였음. 봉지를 잘 살펴보니 남조선 국수라는 걸 알게 됐는데 뒷면에 글씨를 읽다가 충격에 빠지심.

 

"판매나 유통과정 중 훼손,변질된 제품은 본사나 대리점을 통해 새 제품으로 교환해 드립니다"

 

이 문구를 보자마자 이웅평 상위는 남조선이 이런 단순한 물건도 편의를 도모할 정도로 발전했고 군인들 중에서도 가장 엘리트인 공군 조종사 그것도 비행교관으로써 선망받는 자신임에도 매일 퇴근 후에 배급받은 석탄가루를 진흙과 섞어서 연료를 만드는 모습을 보고 북한 사회에 치를 떨고 곧 자신이 수령에게 속았다는 걸 깨달으심. (참고로 이웅평 상위가 만드시던 건 당시 남한사회에선 육군 병사들 생활관 빼치카[벽난로]용에나 쓰는 그 연료임)

 

 

 

이후 라디오를 통해 수시로 남한 사회에 대한 정보를 얻으며 고뇌에 잠기던 이웅평 상위는 탈북을 결심하고 1983년 2월 25일 개천비행장을 이륙해 북한의 추격기의 추격과 레이더망을 회피하기 위해 시속 920km의 속도와 고도 50m의 초저공비행을 하며 구사일생으로 휴전선을 넘음. 이때 한국군 F-5 전투기가 요격에 나섰는데 이웅평 상위가 날개를 좌우로 흔들어 항복 의사를 밝히자 F-5는 그대로 이웅평 상위를 유도하여 수원비행장에 착륙하심. 보상금은 당시 정세+북한군 최신 전투기를 이용한 탈북의 따따블 보상을 받아 무려 15억 6000만 원 (현 가치로 100억 이상)을 받으셨음.

 

이웅평 상위는 이후 공군에 소령으로 특별임관해서 중령까지 진급하셨고 공군대학(현 합동 군사대학) 교관으로 근무하셨었는데 가족들을 북에 두고 왔다는 죄책감과 북한 첩자가 해코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쉽게 믿지 못하시고 마음고생을 하시다 결국 2002년 간 이식 수술 후 거부반응으로 인해 사망하셨음. (대령으로 추서)

 

 

 

7. 이철수 대위 귀순 

 

 

1996년 5월 23일 이철수 대위가 자신의 MiG-19(529번기)기를 몰고 평안남도 온천비행장에서 수원비행장으로 귀순한 사건. 귀순의 계기는 북한군의 인사시스템으로 인해 불합리를 당하신 후 회의감을 느끼셔서 귀순을 결심하셨다고 함. 이웅평 상위가 몰고 온 전투기랑 똑같았는데 이때는 이미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대한민국이 압승하고 선진국 반열로 들어가던 꿈과 희망의 시기인 데다 이분이 몰고 온 전투기가 1996년 기준으로 봐도 구형에 누가 봐도 전투기같이 안 생겨서인지 이웅평 상위 때만큼 큰 센세이션은 없었음.

암튼 5월 23일 아침 10시쯤 온천 비행장에서 이철수 대위 포함해서 1개 편대가 이륙해서 훈련하고 있었는데 이철수 대위는 타이밍을 잡다가 그대로 남하했고 황해도의 태탄반도 상공에서 아군 레이더가 이상동향으로 식별 후 즉시 요격기(F-5, KF-16)를 보낸 덕분에 신속하게 유도하여 수원비행장으로 완벽하게 착륙할 수 있었음. 이후 이철수 대위는 대한민국 공군에 특별 임관하셔서 현재 대령으로 군 복무를 이어나가는 중이심. 아마 탈북자 출신 장교 중 최초로 장성급으로 진급할 수도 있다는 희망도 있는 상태. (공군 인사시스템을 몰라서 가능할 진 모르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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